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나라의 일본원정 (문단 편집) == 현대 일본에서 바라보는 시각 == 근현대 일본에서는 이 승리를 자랑하면서 국가적 자긍심으로 찬양했다. 이를테면, 아시아에서 몽골을 이긴 건 유일하게 일본뿐이니 하는 말 등이다. 이에 대하여 반대 주장을 펼친 책이 [[다나카 요시키]]의 [[창룡전]]이다. 사실 원나라를 진짜로 크게 물리친 베트남에서도 원나라에게 호되게 당했음에도 베트남의 명장 [[쩐흥다오]] 지휘 아래 원나라군을 크게 물리친 경우도 있고, 인도나 자바 등 여러 아시아 나라들도 원나라 군을 이겨낸 적이 있다. 문제는 이 허황된 이야기를 한국에서도 그대로 불법 출판한 여러 일본 책자에서 나온 걸 그대로 썼었다는 점이다.이는 [[1990년대]]만 해도 국내에서 번역이 아니라 한국인 저자들이 쓴 인문 역사 서적들에는 전 세계에서 몽골군을 이긴 유일한 나라가 일본뿐이라는 내용이 버젓이 들어갔다. 사실 1990년대까지 국내의 세계사 관련 서적들은 거의 다 일본 서적들을 불법으로 마구 베껴서 나온 것들이었고 그 밖에도 국내의 세계사 관련 지식이 매우 빈약했던 탓도 있었다. 아시아 전역에서는 몽골을 물리친 것은 베트남 말고도 여럿 있었다. [[인도]]나 [[인도네시아]]도 그랬는데 인도는 초창기 몽골 제국 시절 1299년 킬리 전투에서 몽골 왕자인 쿠틀륵이 이끈 20만 명의 몽골군을 30만 명의 기병과 2700마리의 전투 코끼리 부대로 격파했고, 1306년 다시 쳐들어온 10만 명의 몽골군을 라비 강 전투에서 격파하여 그중 6만 명을 포로로 잡아 [[델리]]로 끌고가 [[코끼리]]들한테 짓밟혀 죽게 하는 식으로 몽골군을 상대로 정면으로 평야에서 대규모 군대를 투입하여 대승리를 했었다. 그리고 훗날 원나라가 자바 원정을 시도했을 때 인도네시아 역시 북중국의 기병 위주 원군의 허약한 수군을 공략해 이를 막아냈다. 심지어 미얀마도 파간 왕조가 원나라의 대대적 공세로 멸망했으나 끝내 원나라가 정복하는 건 실패했다. 물론 이때 원나라 침입과 이후 신뷰신과 싸우던 청나라 팔기군의 침입 후 [[미얀마인]]들은 [[중국인]]을 굉장히 혐오하여 중국 하면 이를 간다. 이민족 정복왕조들 때문에 한족까지 싫어하게 된 것이다. 덤으로 몽골을 물리친 일본도 그렇지만, 여러 나라들은 이기긴 했어도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쩐흥다오도 3번이나 엄청난 대군을 막아냈지만 4번째 원나라군 파병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에 이미 군이 한계라고 포기했고 대월국 인종도 사신을 보내 항복하려고 했다. 조공을 바치며 신하 나라로 대원제국을 받들겠다고 했지만, 쿠빌라이칸은 거절하고 각오하라고 사신을 내쫓았던 것. 그러다가, 쿠빌라이칸이 운좋게 병사하는 통에 겨우 위기를 넘겼으나 기회를 보던 [[참파 왕국]]에게 대월은 크게 패했으며 이후 명나라에게 1407년 정복당해 21년동안 지배받아야 했던 것도 몽골과 전쟁에서 쏟아부은 점이 컸었다. 나아가 당시 태풍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으며 실제로는 원나라가 일본군에 의해 전술적으로 격퇴되고 있었다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물론 위위 2차 침공 문단에서 볼 수 있듯이 2차 침공 한정으로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카미카제]] 특공대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나라를 구한 태풍'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며, 그로 인해 자국 무사들의 역할을 지나치게 깎아내렸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승자'인 일본 측의 기록에서는 승전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더 많으므로, 이러한 것들을 취사선택하여 '태풍은 부차적인 요인이었고 원나라는 이미 패퇴하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기도 한다. 그러나 원나라의 집단 전법과 다양한 화약 병기 등 일본 입장에서 굉장히 생소한 전법으로 인해 일본군이 초반에 압도되었다는 것은 당대 일본 사서에 엄연히 기록된 내용이기도 하므로, 쉽사리 '일본의 퍼펙트 승리'를 주장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사실 여원연합군을 상대로 싸운 일본 무사들은 여원연합군이 강할 때에는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다가 연합군의 함대가 태풍으로 침몰하고 나서야 고립된 연합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펼쳐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여원연합군과 싸운 경험을 묘사한 그림인 몽고습래회사의 주인공이기도 한 타케자카 스에나가는 여원연합군의 1차 침공 이후에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다가 연합군의 2차 침공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야 가마쿠라 막부에 포상을 요구하러 말까지 팔아가며 가마쿠라를 찾아가서 지토에 임명되었다. 또한 정작 여원연합군이 상륙을 시작한 6월 말 즈음에서 7월 1일까지, 일본은 이키 섬 지역을 점령당하고 규슈 북부의 섬들을 차례로 점령당하는 사태를 빚게 된다. 이후 가미카제가 온 것이 7월 말~8월 초 경이며, 일본군의 대대적인 반격은 바로 이 가미카제 이후에 이루어지며, 일본군에 의한 연합군의 잔당 소탕도 9월경에나 완료된다. 즉, 연합군은 보급이 끟기고 큰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고립되어 전멸하였던 것이지 결코 일본 무사들의 무력에 밀려서 전멸했던 것이 아니었다.[[https://cafe.daum.net/historywar/2LjP/1200|#]]] 1950년대 일본에서 이 원정을 흥미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가 지은 《풍도(風濤)》.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원제를 그대로 쓴 것과 적당히 의역해 '검푸른 해협'이라고 제목을 붙인 두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일본"이 주인공이 아닌 [[충렬왕]]과 [[김방경]]이 주인공으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다룬다. 사실 이 당시의 고려를 [[연합군 점령하 일본|미 군정 하의 일본]]에 빗대어 [[냉전]] 시기 군사 기지화 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노우에 야스시의 이 소설이 의외의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고 평가받는다.[* 출처: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8227&yy=2013|매일신문 사설 "일본 각료들의 자질을 우려한다"]]] 물론 본토는 크게 피해를 입지 않았고 하도 오래 전 일이라 별 신경 안 쓰는 사람도 있는 등 개인차는 있다. ||[youtube(xtyGtidO-hk)]|| NHK 대하드라마 <[[호죠 토키무네]]>(2001년)에서 이 원정을 다루었다. 해당 방송 [[http://blog.naver.com/halmi/50034751810|38화 中]]. 참고로 해당 영상에서 처음 날리는 화살은 '카부라야' 혹은 [[효시]], [[명적]] 화살이라고도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는 화살인데 일본에서는 당시 이것과 [[나노리]]로 개전의 신호를 알렸다. 하지만 고려인들이나 몽골인/거란인/여진인들 혹은 원나라 치하 한족들은 그런 격식을 갖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당장 섬 안에서 지들끼리 영지 갖고 치고박던 일본과 달리 중국은 한족과 이민족이 오랫동안 피 터지게 진심으로 전란을 벌여왔으며 요나라가 송나라를 격파하고 연운 16주를 뜯어가거나 이후 금나라가 송을 남쪽으로 밀어낸 [[정강의 변]] 같은 죽기살기로 싸운 이벤트가 많았다. 당장 그 원나라도 남송을 피터지게 싸운 끝에 간신히 멸망시켰다. 요-금-원에 차례로 시달리고 왜구 침입까지 겪은 고려는 말이 필요없었다. 고려나 중국에게 있어 싸움은 생존을 건 문제였지 무슨 예의 따질 여유가 없었다.]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여원연합군이 [[트레뷰셋]]을 사용해 던지는 폭탄은 진천뢰로 추정된다. 이미 [[금나라]] 때 개발되었으며 조선의 [[비격진천뢰]]와는 달리 [[수류탄]]에 가까웠다. 주로 손으로 던지지만, 각종 투척기로 날려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작가의 독특한 해석인지, 1차 원정 때 원군의 철수 이유를 태풍 때문이 아닌 [[오늘은 이만 물러가 주지|일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1차 원정이 원의 무력 시위였다는 해석이다.[* 독특한 해석까지는 아니고, 일본에서도 몽골사나 중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많은 수가 이런 의견을 보이고 있다.] 다만 연출 시 고증에 문제가 있는데, 몽고습래회사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는 고려군을 몽골군과 똑같이 만들었다. 또 고려의 [[김방경]]과 원의 [[홍다구]]도 등장했는데 한국인 배우가 아닌 중국인 배우를 김방경으로 출연시켰다. 사실 한국 사극도 일본인이나 중국인 배역에 한국 배우를 기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것을 고려하면 그냥 되는대로 쓴 듯 하나, 13세기 고려에서는 손꼽히는 인물인 [[김방경]]의 역사적 입지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친원파 홍다구를 중국인 배우가 맡고 김방경은 재일동포나 한국인이 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1892년]]에는 일본이 제국주의로 접어들며 이것을 기념하는 [[군가]]도 만들어젔다. [[원구]] 문서로. 이후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청을 압도한 뒤 원구의 복수를 했다고 여기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